교육과정을 푸는 고리 - 통합
작성자 : 윤재향 | 등록일 : 2021-08-23 14:24:04 | 조회수 412

넘나들기 : 통합과 통섭

 

우리는 평생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배움은 명확하게 ‘수업’이라는 형태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친구와의 갈등, 결혼 생활 안에서 겪는 일들,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는 것 등 수많은 배움 속에서 살게 되지요. 그런데 유독, 어린이 시절에는 그 배움이 이런 형태로 나타납니다. 정해진 학교 속 “수업”에서 “지식”을 배우지요. 그렇게 익힌 “지식”은 내가 살아가면서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냥 “지식”으로만 끝나기도 합니다.

볍씨에서는 삶과 배움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이게 중요하구나!’라는 앎을 어린 아이들은 삶 속에서 깨우쳐 갑니다. 이것이 중요해라고 백 번 말해도 그게 실제 배움 속에서 실현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니까요.

이렇게 삶과 배움은 하나이기에, 우리가 지내는 일상의 생활과 학교에서 지내는 생활은 삶의 형태와 같아야 합니다.

 

연령 통합

 

살면서 한 연령만 따로 떨어져 지내게 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동네에서도 여러 연령의 섞여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단지 학교에서만 동일연령으로 지내게 되지요.

동일 연령 집단에서 우리는 평균을 이야기합니다. 10살이 모인 집단에서 평균을 기준으로 그 이상과 이하가 있습니다. 평균과 평균 이상일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어떠한 집단에서도 만들어질 평균 이하에 있는 아이들은 다릅니다. “똑같은 3학년인데, 왜 쟤는 저렇게 하는데 우리 아이는(나는) 저렇게 못하지?!” 비교치로 인해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사람이 자라고 익히는 속도는 모두 다릅니다. 평균이라는 이름으로 비교해서 잘라낼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 스스로도 자존감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고요. 여러 연령의 아이들이 함께 모이면 자기가 원하는 속도로 배우고 자라는 영역이 넓어집니다. 빠른 아이들은 빠른 대로, 느린 아이들은 느린 대로. 완충지대가 늘어나는 셈이지요.

여러 연령의 아이들이 함께 지내면 공동체 안에서 여러 가지로 소통하는 방법도 익힐 수 있습니다. 사회에는 언제나 여러 연령의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여러 연령의 아이들이 언니 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서로 상호작용하고 언니는 언니 역할을 하면서, 동생은 동생 역할을 하면서, 또 동갑내기와 지내면서 함께 사는 방법을 익혀갑니다. 역할을 수행하면서 배워가는 것들도 많습니다. 또 그 역할은 언제나 변화하기에-올해는 반 안에서 언니 역할을 하지만 내년에는 동생 역할을- 부족한 부분은 채워지고, 시행착오를 계속 해나가면서 더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볍씨에서는 동일 연령의 아이들로 반이 구성되어있지 않습니다. 비슷한 연령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합니다.

2020년 현재는 1~3학년 / 4~5학년 / 6~8학년 / 9학년으로 생활반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생활반 뿐만 아니라 연령을 넘어선 여러 가지 주제의 모임(수업) 역시 함께 꾸려집니다.

 

교과 통합

 

우리 삶에서 지식은 따로따로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수학만 따로, 국어만 따로 지식을 사용하진 않습니다. 옷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을 고르는 미적 안목, 천에 대한 이해, 소근육 발달, 옷본을 만들기 위한 수학적 능력 등 수많은 능력과 지식들이 함께 사용되지요. 천연 염색과 화학염색, 패스트 패션 등 인문 사회학적 접근도 가능합니다. 옷 한 벌을 만드는 활동 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와 여러 가지 지식(과목)들이 존재할 수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이 모든 내용들을 뚝뚝 떨어뜨려 “수학” “국어” “사회” 등의 분절되고 파편화된 형태로 배워왔습니다. 볍씨에서는 이렇게 분절되고 파편화된 배움이 아닌, 온전한 배움을 이루어나가기 위해 연령 통합과 더불어 교과 통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장애・비장애 통합

 

아이들은 다 다릅니다. 생김새도, 키도, 몸무게도, 기질도, 몸∙마음∙생각 각 영역의 능력치도, 발달 속도도, 유전 요인도, 가정의 문화도, 경제적 여건도,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도, 심리정서적 특성도 천차만별. 같은 아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장점과 단점, 뛰어난 점과 힘든 점을 갖고 있습니다. 개별 성향의 측면에서 아니면 성장 시기나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그중에 어떤 모습이 부각되기로 하고 축소되기도 할 뿐, 결국 모든 아이는 빛과 어둠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사회는 어떤 아이들에게 ‘○○장애’라는 꼬리표를 붙입니다. 아이에 따라서 가정의 분위기와 상황, 이전의 경험이나 교육 현장에서의 요구 때문에, 그런 꼬리표를 달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움직임이 많고 아주 활발하고 발산하는 에너지가 강한 아이’ ‘분노를 조절하는 힘이 약한 아이’ ‘학습 속도가 느리고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아이’로 묘사되는 것으로 그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ADHD' ’ODD' '정신지체‘로 진단을 받은 아이가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성향과 발달 능력을 보이는 아이인데도 말이지요.

볍씨는 아이들을 진단명이나 외면적인 모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만남을 통해서 이해하고 서로 배워나가는 공간이고자 합니다. ‘다름’을 우리 사이를 가르는 경계로 삼지 않고 더 배울 수 있는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것, 포용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소중히 여깁니다.

볍씨엔 장애아이만을 위한 특별한 교사나 공간, 교육과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진정한 통합을 방해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통합이 ‘똑같이’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다 다른 아이에게 일률적인 접근, 교육 방식은 오히려 폭력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교사들은 연초에 아이 하나하나를 살피며 개별적인 목표와 주안점, 작용 과정을 상정하고 교사회 안에서 함께 검토합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도 그 안에 있고 같은 맥락에서 교육과정을 실행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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